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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학교 및 신식학교(20세기 초반)의 설립역사에 대한 이해-임희국 교수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3-04 10:36:27 조회수 68

* 본 협의회 2016년 제11회 기독교사 교직공통과정 연수시 강의자료 일부입니다.  

 

 

기독교학교 및 신식학교(20세기 초반)의 설립역사에 대한 이해 

    

                                                                                             

                                                                                                     임희국 교수(장신대)

 

 

글의 순서

1. 함께 생각해 볼 일

2. 수용과 전파, 혹은 전파와 수용

3. 학교설립 배경: ()“문명의 빛으로 대중에게 다가온 기독교(개신교)

4. 신식학교 혹은 기독교학교의 설립

4-1. 내한 선교사 혹은 토착 교인이 설립한 기독교학교

4-2. 교육구국운동으로 일어난 사립 신식학교 설립운동

4-3. 신식학교, 경상북도 안동 유생들이 설립

4-4. 기독교학교, 북간도 명동촌 유생들이 설립

5. 19458·15해방 이후, 1950년대

5.1. 1950년 전후(前後) ·북한의 학교교육 상황

5.2. 학교재건 운동

5.3. 공민학교(성경구락부)운동

6. 정리

 

1. 함께 생각해 볼 일

 

이 글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기독교학교 설립과정을 살펴보는 일이 주된 목적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시기의 기독교학교를 떠올리면 대부분 선교사가 세운 학교를 많이 생각해 왔는데, ‘토착인(한국인) 교육자도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면서, 이번 글에서는 새롭게 자료를 모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착안했다.

기독교학교가 설립되던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조선왕조가 몰락해 가던 상황이었고, 이와 더불어 기존 사회경제질서는 물론이고 전통 종교와 정신문화까지 그 뿌리째 흔들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식이 깨어있어 앞을 내다보는 지식인들은 소위 ()문명이라 일컫는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보고자 했다. 그들은 또한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소위 신식학교라고 파악했다. 그런데, 신식학교를 세운 선교사에겐 이 학교가 그냥 신문명의 서양문물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기독교학교였다. 이 학교가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을 가르치는 한 편, 학교의 정체성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더욱 크게 의식했다고 본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학교를 토착인 교육자들 일부는 신문명을 소개하고 서양문물을 가르치는 신식학교로만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일(同一)한 학교를 놓고서 한 편은 기독교학교라 불렀고 또 다른 한 편은 신식학교라 불렀을 개연성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짚어 보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2. 수용과 전파, 혹은 전파와 수용

 

우리가 만일 신식학교에다 방점(傍點)을 둔다면 서양문명의 수용을 위한 학교설립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겠고, 그러나 만일 기독교학교에다 방점을 둔다면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를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문명수용, 혹은 복음전파. 물론 이런 착상은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그 쪽으로 편들자는 뜻이 아니고, 그런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 타당하지도 않는데, 양자(신식학교-토착인 교육자와 기독교학교-선교사)의 관계를 규명해 보자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살피며 이 점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먼저, 서양문명의 수용을 위한 신식학교 설립에다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1876년 조선정부가 쇄국정책을 풀고 문호를 개방했는데, 이것은 조만간 서양문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는 점을 예견하게 하는 개방이었다. 이 정책을 반대하는 위정척사론자들이 거세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 결정을 뒤 짚을 수는 없었고 이제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방안을 얘기해야 했다. 문호개방정책은 서양문물을 총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되 유교국가의 약점을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양의 동점(東漸)이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서양의 자연과학군사기술의 우수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방안인데, 이 방안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 불렀다.

조선정부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되 서양의 종교는 수용하지 않는 정책을 정했다. 그런데, 급진개화파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방편으로 개신교(야소교耶蘇敎,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 구상은 일본 동경주재 중국()공사관 참찬관이었던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통해 착안되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수신사(2)로 일하던 김홍집(金弘集)1880년에 국내로 가져와서 소개했는데, 그 책에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을 이루고 친중국결일본연미국(親中國·結日本·聯米國)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개신교(야소교耶蘇敎,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고 개신교의 신앙은 무해유익(無害有益)하다고 덧붙였다. 이 책은 오랜 세월 동안 조선의 지배층이 갖고 있던 관점, 즉 천주교와 개신교를 동일시 해 온 관점을 바꾸게 했다. 게다가 중국의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정부에게 (개신교의 나라인) 미국과 통상관계를 맺도록 권유했다. 이를 받아들인 조선정부는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조미조약(朝美條約))을 맺었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를 앞세운 프랑스 등 유럽의 제국들을 멀리했고, 반면에 개신교의 나라인 미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한 편, 일본에서는 김옥균이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이들에게 조선 선교를 요청했다. 이것은 -기독교에 신앙적 관심이 아니었고- 오로지 조선의 개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방안에서 비롯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감리교회는 일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에게 조선 왕실을 방문하도록 했다. 맥클레이는 18846월에 조선으로 갔고 고종으로부터 학교사업과 병원사업의 윤허를 얻었다. 그리고, 1885년에 미국의 개신교(장로교회, 감리교회)가 첫 선교사 6명을 조선에 파송했다.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부부, 스크랜튼(William Bention Scranton)부부 및 스크랜튼 모부인(M.S. Scranton), 그리고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였다. 이들은 그해 45(부활절)에 조선의 제물포(인천)에 도착했다. 조선정부가 허락한 선교활동의 범주는 교육과 의료부문으로 제한되었으며 공개적인 포교는 금지되었다. 비자에 명시된 이들의 신분은 의사나 교사였고 선교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조선정부의 문호개방(1876)에서부터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입국(1885)까지 약 10년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 조선정부는 동도서기론의 차원에서 신문명이라 일컫는 서양문명을 수용하고자 미국 선교사의 입국 허락했다. 미국 개신교 파송 내한 선교사들은 이제부터, 조선정부의 입장으로는, 서양문명을 소개하고 전달하는 노릇을 하게 된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배재학당(培材學堂, 배재중고등학교)을 세웠고, 그 이듬해에 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 스크랜턴의 어머니)이 이화학당(梨花學堂, 이화여자대학교)을 세웠다. 언더우드가 언더우드학당을 세웠다. 18849월에 입국한 알렌(Horace N. Allen)은 주한미국 공사관 공의(公醫)의 자격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서양식 병원 광혜원(廣惠院, 1885.4.3)/제중원을 설립했다. 스크랜톤은 1886년 시병원(施病院)을 설립했다.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왕실의 격려가 매우 컸다. 고종황제는 손수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이름과 시병원(施病院)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명성왕후도 첫 여학교의 이름을 이화(梨花)로 지어주었고 또 첫 부인병원의 이름을 보구여관(保救女館)으로 지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왕실의 입장 역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신문명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신식학교였다.

 

이제, 선교사들의 기독교학교설립에다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정부가 선교사들에게 요청한 학교설립은 신문명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신식학교였지만, 선교사들은 이 학교의 정체성을 기독교 전파에다 두었다. 방금 살펴본 대로, 내한(來韓) 선교사들은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설립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그들이 세운 기독교 기관에서 예배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만큼 조선정부의 입장이 확고했다. 그러다가, 신식병원 제중원이 개원된 지 두 달 만에(621) 비로소 알렌의 주관으로 몇몇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첫 번째 공식예배였다. 그 날 이후부터 매 주일 제중원에서 선교사들의 예배공동체가 성립되었다. 이 예배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미국 공사관의 대리공사 포크 등이 참석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역시 선교사인데도 드러내놓고 예배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중원은 조선(한국)의 법에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治外法權) 구역이므로, 국법으로 금지된 종교행위인 기독교 예배를 이곳에서는() 드릴 수 있었다.

 

3. 학교설립 배경; ()“문명의 빛으로 대중에게 다가온 기독교(개신교)

 

구한말에 신식학교 내지 기독교학교가 설립된 배경은 근대화가 시작된 시기와 겹쳐있다. 청일전쟁(1894) 직후부터 대략 10년 동안은, 고미숙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근대()가 시작된 기원의 공간이었다. 이때의 근대는 외형의 체제변화(정치, 경제)를 넘어 사유체계와 삶의 방식, 규율과 관습 등 개인의 신체를 변화시킨 것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 이래로 근대화의 담론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왔는데, 여기에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담론의 형성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첫 번째 담론은 충군애국이었다.황제폐하라는 용어가 여전히 공공의 영역에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봉건 전제군주(專制君主)의 의미가 아니었고 근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의 군주로 이해되었다. , 백성이 군주에게 위임해준 권력을 행사하는 역할과 기능을 뜻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국가이해와 국민의식을 불어넣어 준 인물들이 서양 선교사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 이후에 이처럼 중화주의(中華主義) 질서에 속해있던 전제군주적 표상들이 거의 대부분 소거되었고 또 그 질서가 실제로 쇠퇴해졌는데, 이제는 빈 공백으로 남겨진 그 자리가 입헌군주제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 자리로 서양 문명이 새로운 대안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문명이 기독교(개신교)의 나라로 표상되었다.” 나라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가 하나님(하느님)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복속으로 나아갔다.

이 무렵에 일부 지식인들이 애국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하여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1903/4년에 간행된 감리교 신문인 신학월보부자되는 법이란 글이 실렸는데, 이 글에서는 우리 나라의 우상 섬김, 미신, 타락한 전통종교야 말로 개인과 국가의 경제를 거들내고 백성의 정신을 썩게 만든다고 질타하였다. 반면에 오늘날 서양이 부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종교에 있다고 전제한 다음, 서양의 정치질서와 법제도 또 사회도덕과 풍습이 기독교 정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지난날 주색잡기와 미신에 빠져 있다가 예수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다음부터 삶이 달라져서 지금은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개신교의 초창기이래로 활발한 전통으로 확립된 사경회(성경공부)계몽에 강조점이 있었다. 어둠 속에 있던 백성이 성경의 을 통하여 밝은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뜻이 있다. 문맹인이 한글을 깨우치고 글을 읽게 됨으로써 지식을 깨우쳤다는 뜻이 먼저이고, 그 다음엔 성경을 읽으면서 참 하나님을 섬기고 미신과 우상을 버렸다는 뜻이다. 성경의 빛을 통한 계몽은 간혹 낡은 관습 타파와 세습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변혁도 시동(始動)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신앙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나라 국민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악함에서 선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확신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사람의 손에 성경이 전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몽의 성격이 짙은 사경회는 때때로 대중의 의식각성을 촉구하였다. 특별히 신학월보에 실린 논설이 눈에 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이 논설은 우리나라가 외국 군대의 싸움터가 된 서글픈 현실을 개탄하면서 우리나라의 실 낯 같은 혈맥은 다만 예수교회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세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길은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며 영원한 복을 위하여 목전에 좋은 것을 물리치신 것인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런 이치를 아는 자는 (오직) 예수교인뿐이요 이런 사정을 근심할 자도 (오직) 예수교인 뿐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 논설은 예수교인은 성경의 이치를 전국에 전파해서 (...) 나라와 동포를 구하는 길은 정치 법률에 있지 아니하고 교화로써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음에 있는 줄로 깨우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교인들이 2천만 잠자는 동포들을 깨우쳐야 할 사명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예수교인들이) 내 나라 내 동포의 건짐(구원)을 모른 채 하면서 제 영혼 하나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참 이치와 예수의 근본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잠자는 동포를 깨우치는 일이 곧 대중의 의식을 각성케 하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계몽담론 안으로 깊이 들어온 개신교는 이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서호문답’(대한매일신보, 190835일부터 318일까지의 연재)에서 지금 예수교로 종교를 삼는 영미법덕국의 진보된 영관이 어떠하뇨 우리 동포들도 이것을 부러워하거든 그 나라들의 승봉하는 종교를 좇일지니라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유, , 선도를 모두 가치 없다고 비판한 뒤, 예수교야말로 민족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것은 예수교”(개신교)와 민족담론의 결합이었다. 개신교는 이런 점에서 천주교와 그 담론의 층위를 달리했다. 18세기부터 조선에서 포교된 천주교는 서양을 표상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교리로 받아들여졌고 조상제사를 가부하면서 충돌을 빚으며 정치적 박해를 받아왔다. 이와 달리 근대 계몽기에 등장한 개신교는 서구 문명을 등에 업고서 문명의 빛으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조선 정부와 갈등관계에 있던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일을 자제하면서 의료·교육 등의 간접선교를 통해서 구한말 계몽기에 기여했다. 이를 통해서 개신교는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종교로 비치었고 또 근대문명과 동일시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는 모두 개신교를 믿는 나라이고 또 개신교가 문명을 이루게 한 근본이므로 개신교를 믿어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문명개화를 열망하는 한국인들에게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근대식(서양식) 건물, 과학기구, 생활용품 등이 개신교와 서양문명을 동일시하게 했다. 그리하여서 여기에 눈을 뜬 사람들은 개신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서양의 부강한 나라와 같은 수준의 문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4. 신식학교 혹은 기독교학교의 설립

 

기독교(개신교)가 대중에게 신()문명의 빛으로 다가오자, 그 빛의 눈부심에 매료되어 기독교에 호감을 갖고 교회 다니며 성경을 읽고 배우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교인들 다수가 기독교를 신문명으로 이해하면서(기독교와 서양 문명을 동일시 함)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신문명의 서양문물을 가르치는 신식학교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 ‘교회 곁에 학교설립은 기독교 전통에서 칼뱅 개혁교회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선교사나 토착 교인이 설립한 신식학교의 정체성은 기독교학교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구한말에 설립된 신식학교 내지 기독교학교의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4-1. 내한 선교사 혹은 토착 교인이 설립한 기독교학교

 

앞에서 조금 살펴본 대로, 1885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여러 학교를 설립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학생이 좀체 입학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정부의 문호개방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점을 얘기한다. 일반 대중에겐 외국인 선교사들이 매우 낯선 소위 양귀자”(서양귀신)로 비치었는데, 어느 부모인들 자기 자식을 그들이 세운 학교에 보내고자 했겠는가? 그러나 선교사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사망자가 속출하는 전염병(, 콜레라)에 맞서서 목숨 걸고 환자를 돌보며 치료하자, 그 희생적 돌봄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선교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졌다. 또한 결정적으로, 서양문명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던 중국()을 군사력으로 물리친 청일전쟁의 결과에 충격을 받은 대중이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에서 호기심으로 돌아섰다. 대중의 인식이 바뀌었던 것이다.

1895년에 서울의 새문안(신문내)교회가 기독교학교인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세웠다. 이 학교의 설립은 1887년에 미국 선교사들이 교회 안에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의 발전에 힘입었다. 구세학당의 학생이었던 송순명(松淳明)이 영신학당의 선생으로 가르쳤다. 이리하여서 이제부터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존의 기독교학교와 토착인(한국인) 교인들이 세운 기독교학교가 나란히 양립하였다. 같은 해에, 평안도 용천군의 신창(新倉)교회, 정주군의 정주읍(定州邑) 교회, 박천(博川)군의 남호(南湖)교회도 각각 사숙(私塾)을 설립하였다. 사숙 혹은 학당은 정부(학부)의 인가와 함께 정식 학교로 발전하였다.

기독교학교의 설립이 활발하게 확산되었고, 18978월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연례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선교사 배위량(Baird)이 입안한 교육정책(“우리의 교육정책(Our educational policy)”)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기독교학교 설립과 운영의 기본이념은 학생들에게 유용한 지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서 실제생활에 기여하고 더 나아가서 이들이 장차 책임 있는 일꾼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학교는 학생들의 신앙증진과 정신함양을 위해 교육시켜야 할 것이며, 그 무엇보다도 이 학생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어서 토착교회(native church)를 형성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학생들이 장차 농부나 대장공이 되건, 의사나 교사가 되거나 혹은 정부의 관리가 되던 간에 복음을 전하는 능동적인 복음전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마무리 지었다. 이 교육정책 아래에서, 한 걸음 더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었다. “1) 각 지 교회 지역구의 초등학교를 발전시키고, 2) 이 초등학교 교원의 확보를 위하여 특별 단기 사범과를 두어서 재직교원(在職敎員)과 기타 유망한 사람들을 모아 교원을 양성하며, 3) 특별히 선발한 학생들을 중학교와 나아가서는 전문학교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도록 할 것이며, 4) 부대적으로 교과서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선교부는 배위량을 평양선교지부로 전임(轉任)시키기로 결의했고, 그는 그 해 10월에 평양으로 이주했다. 평양의 선교사역은 이 무렵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고, 이 사역은 평안도지역과 황해도의 북부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898년 서울 연동교회가 연동소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평안도에서는 평양의 장대현(널다리골, 장대재)교회와 의주군의 남산교회가 각각 사숙을 설립하였다. 1900년에는 의주읍 교회, 선천읍 교회, 황해도 황주군 용연교회가 각각 사숙을 설립하였다. 교회들이 학교를 설립한 동기는 하나같이 교인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경건교육(성경·기도)과 지식교육(영어·산수 등의 신() 지식교육과 전통 한문교육)을 병행한 기독교교육이었다. 많은 경우에, 토착 교인들이 직접 학교를 운영하면서(재정부담)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하였고, 선교사들은 그 곁에서 협조하였다.

영남지역 대구에서 1900년 남문안교회(지금 제일교회) 교인들이 남자 소학교를 설립했다. 대구의 첫 장로교회인 남문안예배당이 설립된(1897) 지 불과 만 3년 만이었다. 교회가 지역의 첫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의 공식 이름이 사립 대남학교(私立 大南學校) 또는 예수교 대남소학교(耶蘇敎 大南小學校)였다. 여자 소학교도 이 무렵에 설립되었고, 그 이름이 신명여자소학교였다. 학교설립에 필요한 재원의 절반을 한국 교인들이 마련했고 나머지 절반의 재원을 선교사들이 개별적으로 헌금하였다. 계속해서, 학교운영을 위하여 교인들 스스로 헌금했고, 이들이 운영비 절반 정도를 담당했다.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서 1904년에는 학생수가 28명이었고, 1905년에 47, 1908년에 167명이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호남지역에서도 190776일 호남학회가 창립되었다. 서울에서 자강운동과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호남출신 인물들이 자기 지역으로 와서 (신식)학교 설립을 도모했다. 호남학회는 제주도에도 지역 회원을 두었고, 제주도 성내교회(1908년 설립)가 남녀소학교를 설립했다.

 

4-2. 교육구국운동으로 일어난 사립 신식학교 설립운동

 

대략 러일전쟁 직후부터(1904) 교육구국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의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구체적으로 신식학교(사립)설립을 통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의 목적은 교육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살리자는데 있었다. 러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대중들을 깨우치려는 교육에 초점이 있었다. 이 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그 이전까지의 계몽운동과 달랐다. 이전의 계몽운동은 대체로 정치개혁을 통한 사회계몽에 초점이 맞춰졌고 또 정부의 보조와 지원을 자주 받았던 반면에, 지금의 애국계몽운동은 -정치활동이 법적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띨 수 없거니와 정부의 힘을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 까닭은 노일전쟁(1904)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해서 내국인의 정치활동을 법적으로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한제국은 을사늑약(1905)과 함께 외교권을 박탈당한 무력한 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국계몽운동은 국권회복(國權回復)과 구국(救國)에 그 목적을 두었고, 신식교육제도의 설립과 산업진작을 통해 이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이 운동은 실력양성(實力養成)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 자력신장(自力伸張)을 통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렇게 교육구국운동의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사립 신식학교가 설립되었다.

4-3. 신식학교, 경상북도 안동 유생들이 설립

 

교육구국운동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에서 신식학교의 설립을 추진한 유인식(柳寅植)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서울에서 이제 막 시작된 애국계몽운동을 관찰하고 귀향했다. 이제부터 고향에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신식교육을 시켜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려 했다. 그의 계획은 그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대변하는 것인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안동지역의 유림과 유인식의 변화를 엮어서 얘기하고자 한다.

안동의 유림은 본디 위정척사론을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18세기 말 위정척사론에 근거해 천주교를 배척했다. 특히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척사론은 정치적 쟁점으로 선명하게 부각되었고, 이때 안동의 (척사)유림은 도산서원 근처에 있는 시사단(試士檀), 곧 과거시험을 보던 곳에 비석을 세우고 위정척사에 대한 내용을 비문으로 새겨 넣었다. 1876년 정부가 문호개방을 결정하였을 때, 안동 유림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 논리로 정부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에 반대했다. 정부가 1880년이래로 조선책략(朝鮮策略, 황준헌 지음)의 권면을 받아들여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을 때, 안동 유림은 같은 해 11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운동을 일으켜서 이 정책을 반대했다. 영남만인소는 조선책략에서 주장된 외교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조선에는 예로부터 훌륭한 법규가 있으므로 서학을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해서 민씨 정권과 개화파를 공격했고, 이에 정부는 강경책을 써서 탄압했다. 또한 이 운동은 점차 반외세투쟁의 성격으로 바뀌어갔다. 위정척사운동의 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복고적 보수주의였다. 여기에 가담한 유생들은 기존 봉건사회체제를 옹호했다. 그런데 동시에 이것이 자주의식을 고취했으므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위정척사운동은 나중에 의병운동으로 발전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1895)으로 전국의 여론이 들끓었다. 유생들은 국모(國母)인 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하여 크게 격분하며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고 그러나 적절한 대책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또다시 단발령이 공포되자(을미개혁, 1895. 11. 15()) 전국에서 일제히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이 을미의병을 척사유림이 주도했다. 유생 유인식은 을미의병 때에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변하는 국내외의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의 난감한 나라현실을 목도했고, 그 직후에는 정부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고(1897) 황제즉위식을 가졌고,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개화개혁운동을 위해 계몽강연회언론활동정치운동을 펼치는 상황, 그리고 일본의 국권침탈과정을 직시했다. 이러한 변화가 유인식으로 하여금 자기를 성찰하게 했고, 이를 통해 그는 위정척사사상과 무력항쟁만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기엔 어림도 없음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개화파의 주장인 자력신장(自力伸張)과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유인식은 서울의 성균관으로 와서 학문을 닦았다. 새롭게 달라진 성균관의 학제와 교과과정을 통해 그는 세상의 변화를 체득하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의 필독서인 양계초(梁啓超)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었고, 그는 사회진화론적 계몽주의사상과 개화파의 생각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신채호장지연유근 등의 혁신유림들과 사귀면서 생각과 사상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유인식과 안동의 몇몇 유생들은(이상룡, 김동삼 등) 조선이 외세의 부당한 간섭과 침략야욕을 막아내고 독립국가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인재양성에 최우선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신문명(서양문물)을 가르치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새 시대에 필요한 인물을 양성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예견했다. 이러한 인식과 의식은 당시에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난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향의 정서는 유인식의 뜻에 선뜻 호응해 주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거세게 반대했다. 대다수의 유생들은 위정척사 사상을 굳게 지키는 배타적인 자세로 일관해 있었고 또 이들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서당을 운영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으므로 신식 교육을 거부했다. 유인식이 교육구국운동에 관하여 그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스승 김도화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아버지 유필영으로부터 부자의 인연을 끊기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리해서 척사유림과 혁신유림 사이에는 사립학교 설립을 놓고 의견 대립이 서로 팽팽했다.

유인식과 혁신 유생들의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벽에 부딪쳐 있을 때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申泰休)가 사립학교의 설립을 독려하는 흥학훈령(興學訓令, 1906)’을 반포해서 관내 41개 군에 사립학교가 설립되도록 장려했다. 관찰사는 각지의 서당을 모두 폐지하게 하고 그 세 수입으로 들어오는 곡식과 서당토지를 신식학교의 재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이 훈령은 신교육체제를 거부하고 있던 안동의 유림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때마침 고종황제도 흥학조칙(興學詔勅)을 반포해서 사립학교의 설립을 지원했다. 이 조칙은 학부-관찰사-군수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면 단위까지 전달되었다. 황제는 경북의 관찰사가 학교설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에게 칙유문(勅諭文)을 보내 격려하면서 경상도 관찰부에 학교설립자금으로 1,000원을 지원했다. 19066월경에 경상북도 지역 41개 군에 370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고 학생의 수는 4,500명에 이르렀다.

이 같은 정부의 지원에 힘입은 혁신유생들의 노력으로 1907년 봄에 안동 최초의 신식학교인 사립 협동학교(協東學校)가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유인식 외에 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김동삼 등이 발기해 설립되었다. 학교의 명칭은 나라의 지향(志向)이 동국(東國)이며, 면의 지명이 임동(臨東)이어서 ()‘을 선택했고, 또한 7개 면이 힘을 합쳐 설립했다는 뜻에서 ()‘을 선택했다. 이 학교는 임하천 앞에 있는 김대락(金大洛)의 사랑채를 임시교사로 사용하면서, 가산서당(可山書堂)을 수리해 학교건물로 만들었다. 협동학교는 당시 일반 사립학교가 초등교육과정이었는데 비해서 3년의 고등교육과정으로 시작했다. 따라서 이 학교는 당시에 지역의 최고학부였으며 학생들의 나이가 평균 20세를 웃돌았다. 이 학교는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학교는 신민회의 교육구국운동과 호흡을 함께했다.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은 19113월에 배출되었다. 협동학교는 경북 북부지역 첫 번째 사립 신식학교였다.

이처럼, 이 지역에서 설립된 사립 신식학교는 기독교와 하등의 상관이 없는 신식학교였다.

 

4-4. 기독교학교, 북간도 명동촌 유생들이 설립

 

함경도 종성과 회령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1899218일 두만강을 건녀 북간도(오늘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이주했다. 종성에서 문병규 가문과 그의 외손인 김정규, 김민규 형제가족, 김약연 가문, 남종구 가문, 회령에서 김하규 가문 등 4개 가문 25세대와 통역 일을 보던 김항덕까지 142명이 약속하고 이날 하루에 두만강을 건넜고, 북간도 화룡현의 부걸라재(지금의 명동촌)에 정착했다. 이듬해인 1900년에는 이미 간도의 자동에 와서 살던 윤하현 일가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들은 함북 오룡천일대의 유명한 다섯 학자 (일명 오룡천 5: 최학암, 한봉암, 한치암, 남오룡재, 채향곡)의 후손이거나 문하생이었다. 이들이 북간도로 대이동을 감행한 목적은 대략 세 가지였다고 한다. 1) 조상들의 옛 땅을 되찾는다. 2) 북간도의 넓은 땅으로 들어가서 농사지으며 이상촌을 건설한다. 2) 나날이 추락하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인재를 교육한다. 그래서 그들은 북간도에서 구입한 토지 가운데 가장 좋은 땅 1만평을 교육을 위한 학전(學田)으로 떼어 놓았다. 북간도의 새로운 개척지를 제 2의 오룡천으로 만들려는 뚜렷한 계획과 포부를 품고 두만강을 건넜다. 고향에서 선비 학자요 교육자였던 이주민 집안 어른들은 북간도에 정착하자 서당을 차려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김약연 선생은 용암촌에 규암재라는 서당을, 김하규선생은 대룡동에 소암재라는 서당을, 남위언 선생도 중영촌에서 남오룡재라는 서당을 열었다.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침, 천자문을 떼고 나서 사략, 통감, 사서삼경 등을 가르쳤다.

그런데 북간도에서 1906년 신교육운동이 일어났다. 신민회 회원인 이상설이 여러 회원들을 참여케 하여 용정촌 서전 벌판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이때 나라의 기세가 기울어져 일본에게 합병되어 가니 뜻있는 이들이 국외(만주)에 나와서 인재를 길러 광복의 기틀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이상설과 뜻을 함께 한 지사(志士)들은 이동녕(이량), 박정서(박무림), 황달영(황공달), 정순만(왕창동), 여조현(여준), 김우용(김동환), 유기연 등이었다. 이 학교에 스무 살 남짓 되는 청년들 100여명이 만주곳곳에서 모여와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렇게 많은 청년들이 모여든 까닭은 김하규 선생을 통해서 함북흥학회 취지문이 동네마다 배포되었기 때문이다. 지사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지성을 다해 교육했다. 서전서숙의 교육내용은 역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헌법 등 근대교육의 신학문이었다. 그러나 1년도 채 못되어 서전서숙은 문을 닫았다. 19073월 숙장 이상설 선생이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에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또한 조선 총독부의 출장소가 용정에 자리 잡으면서 방해와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문을 닫자 학생들이 더러는 서울로 유학을 가기도 했고 또 일부는 자기 동네에 돌아가서 학교를 세웠다. 비록 학교는 1년도 채 되지 못해 문을 닫았으나 그 정신만은 불붙어 있었다.

서전서숙의 불씨를 나눠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김학연이 명동에 돌아와서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동네 어른들이 여기에 깊이 공감하고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1908427일 명동서숙이 세워졌다. 이 학교는 사실상 김약연 선생의 규암재가 발전한 것이었다. 김약연은 규암재에서 한학의 구식교육을 했는데,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1908년 봄 규암재를 폐하고, 신교육을 시키는 명동서숙을 창립했다. 박무림 선생이 이 학교의 명예 숙장(교장)으로서 외부와 연락하고 교사 모셔오는 일을 맡았다. 김약연 선생은 숙감으로 학교의 실무를 담당했다. 학교 재정은 문치정이, 교사는 김학연, 남위언이었다. 학생은 42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를 모셔오는 일이었다. 백방으로 교사를 찾았으나 구할 길이 없어서 학교당국이 걱정이 태산이었다. 19094월에 명동서숙의 이름이 명동학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5월에 박무림 숙장의 추천으로 25세 청년 지사 정병태(본명 정재면) 선생이 왔다. 그는 서울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 학문을 익혔다. 그는 안창호 등의 지사들이 1907년에 만든 신민회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파견되어 서전서숙을 다시 일으키려 했으나, 불가능하게 되자 명동학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의 교사가 되어 달라는 간청을 받고서 정 선생은 어려운 조건 하나를 내 걸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보는 것을 허락하면 교사로 부임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학교 당국으로서 참으로 난감한 문제였다. 명동촌의 유지들은 모두 한학의 대가들이었는데, 정 선생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조상제사를 폐지해야 했다. 이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정재면 선생의 조건을 따르자니 제사를 없애야 하겠고, 따르지 말자니 이 선생을 모시지 못하면 학교를 유지하지 못할 노릇이었다. 며칠을 두고 회의를 거듭했다. 드디어, 용단을 내렸는데 마을 어른들은 기독교와 함께 들어오는 신문명에다 민족의 앞날을 걸어 보기로 한 것이었다.

1909523일부터 명동학교 학생들은 모두 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로써 명동학교는 기독교 학교가 되고 동시에 명동교회도 창설되었다. 학생들은 신약성서와 찬송가를 한 권씩 구입했다. 교실에서 첫 예배를 올렸다. 설교가 너무나 생소했고 또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찬송도 귀에 설었다. 그러나 차츰 예배에도 익숙해지고 성경공부도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학교를 만들어서 신식교육을 시키자는 정재면 선생의 속셈이 있었다. “학교와 교회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야 민족을 구원하는 사업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 소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북간도에서 교회와 학교는 이신동체(二身同體)로 활동했다. 교회가 설립되면 곧이어 학교가 병설되고 학교가 설립되면 교회가 세워졌다.

정재면은 유능하고 의식있는 선생들을 모셨다. 상동파의 한글학자 박태환, 역사학자 황의동, 한글학자 장지영, 법학사 김철을 교사로 초빙했고, 김영구김홍일도 교사로 초빙했다. 이리해서 명동학교는 민족이념이 투철한 교사진으로 구성되었다. 정재면은 신앙과 애국심(기독교정신과 민족의식)을 함께 교육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해서 이 방침이 반영되는 교재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서 그는 애국심을 키워주는 역사교육을 중시했고 저항정서를 고취시키는 창가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이와 함께 그는 실업정치법률과학 등의 근대교육도 충실히 시행했다. 그는 또한 체육을 중요시했는데, 가끔 연합대운동회를 개최하여 군사행진을 방불케 하는 무장시위를 실시하여 북간도 한인들을 정신적으로 단결하게 했다. 그는 학교교육을 독립전쟁대비과정으로 이해해서 교과과정에 목총을 이용한 병식체조교육을 포함시켰다. 그래서 그는 군사훈련과 체력단련을 교육의 우선순위에 두었다. 정재면 교육단이 이렇게 1908년부터 북간도에 씨를 뿌리고 심혈을 기울여 가꾼 성과는 1920년에 북간도 전 지역에 수백 개의 학교와 교회와 다수의 독립군 부대편성으로 드러났다.

정재면은 명동촌을 근거로 하여 1911년부터 1914년까지(3년 동안) 간도 각 지역 70여 군데에 학교와 교회를 설립했다. 그의 영향력으로 간도에는 반드시 교회 곁에 학교를 세웠다. 북간도 기독교학교들의 교육목표는 근대지향(近代指向)과 민족지향(民族指向)이었다. 근대지향을 위한 교육내용은 인간덕성교육(人間德性敎育)실업교육(實業敎育 : 通譯, 習字,農業, 珠算, 簿記, 手工, 陶畵)민주시민교육(民主市民敎育 : 討論, 演說, 地理, 外交, 東西각국사)법률경제교육(法律經濟敎育 : 經濟學, 法制, 內外地誌)과학교육(科學敎育 : 理化, 生梨, 衛生, 植物, 農林, 數學, 鑛物學, 代數, 幾何, 三角, 物理, 化學, 博物, 身體, 生理)사범교육(師範敎育: 敎育學)외국어교육(外國語敎育 : 英語, 支那語)한학교육(漢學敎育: 童蒙先習, 痛鑑, 史略, 大學, 小學, 孟子)이었다. 민족지향을 위한 교육내용은 국어교육(國語敎育 : 作文, 讀本, 國文法, 初等小學, 어한)애국심교육(愛國心敎育 : 唱歌, 樂隊, 民族史, 體操, 敎鍊)신앙교육(信仰敎育 : 聖經, 禮拜(新約舊約), 讚頌)역사교육(歷史敎育: 신한獨立史, 最新東國史, 오구不忘 )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역사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역사교육의 목표는 지식교육이 아닌 정의의 교육에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와 체육 두 과목을 함께 묶어서 가르치기도 했다. 위의 교육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민족지향을 목표하고 있는 교육에 신앙교육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앙심과 민족의식의 합일이라는 관점에서 나왔다고 본다.

 

5. 19458·15해방 이후, 1950년대

 

5.1. 1950년 전후(前後) ·북한의 학교교육 상황

 

8·15해방이후, 남한에서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부터 한글전용화 정책과 의무교육(6)이 제도적으로 도입되었다. 의무교육에 대한 계획은 이미 미군정청이 19462월에 발표했었다. 그러나 예산부족 때문에 그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미군정청이 1946년 교육재정의 68%를 초등학교 교육에 할애했는데도, -이듬해 6월 현재- 학교재정의 38.6%를 학부모가 찬조금으로 채워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91231일에 신교육법을 공포하고 이듬해(1950) 61일부터 의무교육을 전면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가 공포한 의무교육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동안 시행할 수 없었다.

19506월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녀교육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크게 달라졌다. 살던 집이 포탄을 맞아 잿더미가 되고 평생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경험을 뼈저리게 겪은 사람들은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도 교육을 시키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한 유산상속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서 전쟁의 과정에서 자녀교육열이 뜨거워졌다.

 

8·15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교육제도의 개선과 교육내용의 추진하는 교육국을 설치했다. 19462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민주교육에서 인민교육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교육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교과서편찬집단(위원획)이 조직되어 모든 교과서를 편찬했다.

북한에서 1947년에 교육제도가 새로이 조정되고 정비되었다. 91일부터 인민학교와 중학교의 학년이 단축되었고, 학령 전 아동을 위한 유치반이 신설되었고 또 고급 중학교가 창설되었다. 기술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야간학교·직장학교·성인교육기관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의 교육체계는 유치반(1,6), 인민학교(5), 중학교·기술학교(3), 고급중학(3전문학교(3-4), 대학(4-5), 교원대학(2), 연구원(2)으로 구성된 학교교육체계로 정비되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교과과정은 학생에게 공산당 정권의 이데올로기 정치의식을 주입했고, 일제시대 항일유격대의 활동에 대한 미화작업도 함께 주입했다. 인민학교의 역사교육은 항일유격대 경험을 혁명전통으로 격상시켰다. 인민학교 5학년이 배우는 조선력사과목에서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서 김일성장군의 민족해방투쟁에 관하여 가르쳤다. “애국주의교양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단순한 주변사실에서부터 강의를 출발했다. 예컨대 자기 가정, 동네, 지역 등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전체 국가와 인민을 사랑하도록 이끌면서 그 중심에 김일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북한의 교육개혁은 유물주의 사상교육과 김일성에 관한 미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이 교육은 반드시 기독교 신앙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5.2. 학교재건 운동

 

앞에서 살펴본 대로, 1947년 북한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새로운 교과과정을 통해 학생에게 현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특히 인민학교의 역사교육은 항일유격대 경험을 혁명전통으로 격상시키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미화시킨 내용이었다. 이러한 학교 교육이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했으므로, 교회와 공산당 정권의 갈등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안고서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온 월남 교인들은 어느 정도 정착하게 되자 그동안 중단된 자녀들의 학교교육에 관심을 크게 가졌다. 그 무엇보다도 가정의 미래가 자녀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을 파악한 피난민들은 자녀교육에 대한 의지가 아주 강했다. 또한, 교인들은 -북한에서 다녔던 기독교 학교를 회상하며- 기독교 신앙을 잘 가르치는 학교를 남한에서 재건하고자 했다.

기독교 중등학교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영락교회 안팎의 월남 피난민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이 무렵, 월남한 교인들이 19464월에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를 조직했는데 한경직이 이 단체의 회장이 되었다. 이 신도연합회가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그 이듬해 봄, 미국정부 시찰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교회상황과 학교교육상황을 살펴보고 교육의 장래에 관하여 논의하였는데, 이 기회에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의 한경직·이인식 목사는 시찰단에게 월남 피난민의 자녀교육이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설명했고 이어서 중학교설립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시찰단과 미국 북장로회선교부는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정을 보조했다. 그 결실로 19471125일 대광중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124일 임시 교사로 정한 서대문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개교했다. 신입생이 1학년에서 5학년까지 291명 선발되었다. 한경직이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또 백영엽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학교의 건축기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한경직은 그 이듬해에 미국으로 갔다. 아침에 벌어서 저녁에 먹고 사는 일용직에 종사하는 피난민들의 경제력으로는 학교의 건축을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기에, 한경직은 미국의 교계에다 협조를 구하여 상당한 액수의 건축기금을 모금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광학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안정되자, 한경직은 또 다시 중등여학교 설립문제를 꺼내 들었다. 19506월 그는 영락교회의 부속건물을 임시 교사로 하여, 북한 선천에 있었던 보성학교를 개교하게 했다. 초대 교장에 김양선 목사가 취임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한경직의 학교교육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195231일 북한 정주에 있었던 오산학교의 재건을 위한 모임을 가졌는데, 그는 모교 재건의 발기인이 되어서 상임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시기, 평양에 있던 숭실대학을 재건하고자 서울에서 숭실재건확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에도 참석한 한경직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강요로 폐교 당한 학교를 재건하는데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숭실대학이 1954년 영락교회에서 개교할 때 그가 학장으로 일했다. 부산으로 피난갔던 보성여학교도 영락교회의 서울 복귀(19539)와 함께 교회 안으로 복귀했다.

 

5.3. 공민학교(성경구락부)운동

 

뜻있는 교역자들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학교교육의 기회를 놓친 청소년들, 부모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모아 야간에 기독교 정신으로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자 했다. 북한출신 교역자 김찬호가 19518월에 서울에서 성경구락부(Bible Clubs, 공민학교)를 열어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이듬해(1952) 5월 백상용 집사와 함께 한경직을 찾아가서 성경구락부의 운영에 관하여 의논했다. 한경직은 교회 건물 베다니에서 야간 성경구락부 중등부 과정을 시작하도록 했다. 이 성경구락부가 영락학원으로 발전했다.

당시에 전국적으로 왕성했던 성경구락부의 설립은 한국의 교육사(敎育史)와 한국 교회의 교육사에서도 크게 주목할 만한 교육운동이었다. 195211월에 성경구락부의 재학생이 서울에 약 7,000, 충주에 약 1,000, 거제도에 약 2,000, 인천에 1,500명이었다. 19532월에 전국적으로 300-400개의 성경구락부가 있었고 전체 재학생이 약 30,000명이었다. 이 무렵, 서울에는 93개의 성경구락부가 운영되었고 남녀 재학생이 9,750명이었다. 성경구락부는 초등학교 수준의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성경과 생활신앙도 함께 가르쳤다. 19546월에는 전국적으로 약 1,500개의 성경구락부가 있었고 재학생이 약 55,000명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전국의 재학생(장로교회 소속 성경구락부)이 약 70,000명이었다. 성경구락부에서 가르치는 교사는 대다수 신학교의 졸업생이거나 재학생이었다.

 

성경구락부의 기원은 일제식민지배 시대 평양의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말 평양에서 성경구락부가 소년개척구락부로 시작되었다. 1929년에서 1930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평양에서 선교사 권세열(F. Kinsler) 부부가 잠잘 곳이 없는 거지소년들에게 사택 2층에다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며 함께 찬송 부르고 성경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구락부가 시작되었다. 새 봄이 되기까지 겨울 내내 이 모임이 이어졌고, 그 동안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계속 여기로 찾아오는 소년들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프로그램도 조금씩 늘어났다.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늘어나자, 구락부는 여름부터 노회와 선교부가 경영하는 성경학교 건물을 빌렸다. 이 건물에 청소년 300명 이상이 모였다. 선교사부부의 작은 봉사활동이 청소년 교육을 겸하는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제법 체계를 갖춘 교육기관으로 거듭나면서 이때부터 정식으로 개척구락부로 불렸다. 이 단체의 정신적 기반이 된 성경본문은 누가복음 252절이었다. 구락부에서는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읽기와 쓰기 교육을 시켰다.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엿새 동안 공부시키지만 이 가운데서 하루는 특별한 날로 정하여 신앙교육(기도회, 성경암송 등)과 정서교육(창자, 유희, 체조 등)에 주력했다. 이것은 청소년들의 신앙인격 함양과 이들을 지도자로 키우는 자질향상을 위함이었다. 구락부운동이 평양의 성경학교를 중심으로 연화동교회, 여자 성경학교, 신암교회, 서성리교회, 경창리교회 등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가르치는 선생들은 숭실전문학교와 장로회신학교 그리고 여자 성경학교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3,000명 이상으로 늘어난 구락부의 학생들에게 신앙교육과 함께 나라사랑의 정신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항거하던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구락부의 교육사업이 중단되었다. 19458·15광복 이후, 선교사 권세열이 1949년 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의 학생들과 구락부운동을 재건하였다. 이 때 여러 교회에서 구락부가 세워졌다. 6·25전쟁 기간에 제주도에서는 성경구락부가 피난민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봉사훈련원으로 전개되었고 또 부산에서는 이곳에 피난 온 장로회신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당시에 신학교의 학감과 교장서리를 맡게 된 선교사 권세열은 피난민으로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신학생들이 교사가 되어 이 운동을 펼쳐나갔다. 모든 실내 공간이 -특히 교회에는-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기에, 신학생들은 칠판을 등에 지고 산으로 올라가서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수 백 명씩 모여든 청소년들에게 노천수업을 실시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1952년에 성경구락부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또 그 규모도 커졌다. 이에 따라 1953년에는 지도자들로 하여금 성경구락부의 정신과 이념을 잘 구현케 하고자 지침서요강을 발간하였고, 지도자들의 자질향상을 위하여 정기간행물 <지도자>를 발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성경교과서(최영일 지음)가 발간되었다. 성경구락부는 전국 규모의 방대한 조직체로 발전했다. 그러나 1955년을 정점으로 하여 그 이듬해부터 성경구락부의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까닭은, 6·25전쟁의 상흔이 말끔히 씻어지고 정부가 제자리를 찾게 되면서 공립학교 교육이 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상응하여서 성경구락부는 1957년에 기존의 초등부 과정을 줄이고 중등부과정을 신설하였다.

 

1954년 남한 정부는 1959년까지 취학률을 96%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세우고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1954-59)을 수립했다. 실제로 그해 초등학교 취학률이 82.5%였는데, 6년이 지난 1959년에는 취학률이 96.4%에 이르렀다. 의무교육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렇게 정부가 주도한 의무교육제도가 정착되면서, 교회가 설립한 고등공민학교는 하나 씩 둘 씩 일반 학교로 편입되어 갔다. 1954년이래로 6년 동안에 전국적으로 학교 설립과 더불어 학생의 수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는 소위 교육 기적을 일구어 냈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1945~1960년 사이에 초등학교의 경우 학교 수는 2,834개에서 4,620개로 62.3% 증가했고, 학생 수는 1366,024명에서 3599,627명으로 2.6배 증가했다. 중학교의 경우 학교 수는 97개에서 1,053개로 무려 11배 가까이 증가했고, 학생 수는 5343명에서 528,614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실업계를 합해서 224개교에서 640개교로 3배 증가했고, 학생 수는 84,363명에서 263,563명으로 3.1배 증가했다. 대학교의 경우 같은 기간에 학교 수는 19개교에서 63개교로 3.3, 학생 수는 7,819명에 서 97,819명으로 12배 이상 증가했다.

전쟁 직후부터 1950년대 내내 치솟아 오른 교육열풍과 의무교육의 완성은 우리나라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전쟁을 통해 기존 사회의 계층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교육은 모든 국민에게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는 계층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고 배운 민주주의와 민주의식은 학생들이 적극 참여한 4·19의거(1960)에서 그 효과를 드러내며 독재정부를 종식시키는데 기여했다. 학교 교육과 고등교육의 증대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정부는 학생에게 냉전적 반공주의를 가르치고 주입시켰다.

 

6. 정리

 

이제까지 우리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진행된 기독교학교 설립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기독교와 관련이 없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세운 신식학교의 설립도 살펴보았다. 동일(同一)한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기독교학교라 하기도 하고 신식학교라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무래도, 신문명 수용의 관점에서는 신식학교로 볼 것이고 기독교 복음전파의 관점에서는 기독교학교라 볼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대중에게 기독교는 신문명의 빛으로 다가왔기에, 대중은 새 시대 새로운 사회를 희망하는 가운데서 몰락하는 민족을 구하고자 신식학교인 기독교학교로 왔다고 본다.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이 신문명을 받아들이고자 신식학교를 설립한 경우로 경상북도 안동의 유생들이 설립한 신식학교(사립)를 살펴보았다. 이 경우는 그냥 신식학교이지 기독교학교는 아니었다. 그런데 또한, 북간도의 명동학교는 설립자 유림 선비들이 신식교육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예배와 성경·찬송 교육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학교는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이 병행되었고 이에 따라 차츰 신앙의식과 민족의식이 합일되었다. 그리하여서,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학교와 나란히, 토착인 교육자(많은 경우 유림 선비)가 세운 신식학교는 기독교학교이기도 했고 그냥 신식학교로 머물러 있기도 했다. 물론, 학교의 이름과 무관하게 이 학교에서는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 전국 각처에서 설립된 신식학교 내지 기독교학교의 유형(성격과 특성)을 조사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한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진행된 기독교학교 내지 신식학교의 설립은 우리나라의 근대화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하므로 이 학교는 서양문물을 가르치며 과학기술교육을 중시했다. 그리고, 앞에서 밝힌 대로, 기독교는 대중에게 서양문명과 동일시되었고, 또한 대중에겐 그 문명을 탁월하게 일궈낸 서양 기독교 국가들이 모범적인 국가로 보였다.

20세기 중반 기독교학교의 설립은 한국전쟁(1950-53) 전후에, 특별히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온 교회들과 교인들이 활발하게 추진했다. 그러한 학교들이 오늘날까지 기독교 사립학교로 발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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