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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학교 130여년의 회고와 미래과제-박상진 교수(교장연수강의)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2-01 10:29:22 조회수 45

제56회 교장연수시 박상진 교수님의 강의내용입니다.  

(2016.1.14) 

 

 

 

한국 기독교학교 130여년의 회고와 미래 과제 

 

 

박상진 소장(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장신대 교수, 신학대학원장)

 

1. 들어가는 말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제물포항을 통해 이 땅에 들어와 자기 집에서 고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서 한국의 기독교학교가 시작되었으며, 한국의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기독교학교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이 글은 기독교학교의 지난 130여년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처음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품었던 기독교학교의 비전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기독교학교의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미래 과제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 요한계시록 3장에 나타나는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 가운데 에베소교회를 향한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4-5) 한국에서 기독교교육의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 기독교학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회고하면서 그 사랑이 오늘날 지속되고 있지 못하다면 어디에서 그 사랑이 상실되었는지, 무엇으로 인해 그 사랑이 오염되거나 왜곡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130년 역사를 지닌 기독교학교가 향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학교가 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새로워져야 하는 지에 대한 통찰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초기 기독교학교의 역사를 살펴보되 특히 최초의 개신교 학교인 경신학교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할 것이다. 당시 기독교학교의 모습 속에 담겨있는 기독교교육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최초의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이 지난 130년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성찰할 것이다.

기독교학교의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것을 가로막은 가장 큰 장애물을 역사 속에서 찾는다면 일제의 기독교학교에 대한 탄압과 평준화제도로 인한 기독교학교의 자율성 위축, 그리고 종교를 가르칠 수 없도록 한 교육과정의 왜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학교의 정상화를 가로막는 그 장애물들은 오늘날 그 형태는 변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과연 한국의 기독교학교가 이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어떻게 초기 기독교학교들이 구현하려고 했던 그 기독교교육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이를 위한 기독교학교의 미래 과제를 제시함으로 마무리 될 것이다. 국가의 교육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거시적인 과제가 있고, 개별 기독교학교가 감당해야할 변화의 몸부림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지난 130여년의 기독교학교의 여정을 돌아보되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직시하며 나아가 미래를 조망할 뿐 아니라 그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작은 안내가 되기를 바란다.

 

2. 초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

 

1) 한국 최초의 기독교학교

우리나라의 최초 개신교 기독교학교가 어느 학교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대립되는 주장이 있다면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이 최초의 기독교학교라는 주장과 언더우드가 고아원에서 시작한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의 전신)이 먼저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주장은 전자이다. 배재사에 보면 서소문동 47번지에서 ... 1885년 고영필(高永弼)과 이겸라(李謙羅) 두 학생을 앞에 앉히고 역사적인 처녀 수업을 83일에 개시하였으니 이 아름다운 찰라는 한국의 신교육사(新敎育史)상에 있어서 효시인 배재학당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언더우드의 아들인 원한경((H.H. Underwood, 元漢慶)도 자신의 저서에서 알렌의 년대기’(Chronological Index)를 근거로 배재학당이 한국 최초의 남학교로서 몇 개월 혹은 며칠 먼저 설립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아펜젤러보다 먼저 서울에 도착하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언더우드가 사실상 한 달 이상 먼저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요꼬하마에서 같은 배를 타고 부산을 경유하여 188545일 오후에 제물포항에 도착했으며, 미혼인 언더우드는 그 날 밤에 서울에서 알렌을 만났던 반면, 신혼의 아펜젤러 부부는 갑신정변 후의 치안 불안을 이유로 미국공사 포크(G.C. Foulk)가 강력히 권고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20일에 재입국하였던 것이다.

한국에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학교가 세워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인 이수정과 민영익, 그리고 멕클레이(R. S. Maclay) 선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수정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선교사 파견을 건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長老·監理) 지도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인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 민영익은 한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미국에 파견되어 가우처(J.F. Goucher) 박사에게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인식시켜주었다. 188473일 한국에 파견된 일본 주재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 목사는 약 2개월 간 서울에 머물면서 김옥균을 통하여 국왕을 알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료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윤허까지 받고 돌아감으로써 한국 선교의 길을 열어 놓았다. 결국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는 초대 한국 선교사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튼(M.F. Scranton),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는 알렌(Horace N. Allen)과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18849월 알렌이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기독교 선교활동은 시작하였다. 그러나 1885년 초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1884년 갑신정변(124)으로 국내 정세가 불안하자 일본의 맥클레이 집에 머물면서 입국을 준비하다가 1885년 언더우드(4)를 선두로 아펜젤러, 스크랜튼(6)이 한국에 들어옴으로써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8545일 제물포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서울에 도착한지 3일째 되는 날부터 제중원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고아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188576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매일 오전에 소년 몇 명이 찾아와서 제가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적합한 건물이 있다면 즉시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충분히 많이 올 것 같습니다. 저의 현재 입장이 큰 관심을 끌지 않는다면 10명이나 12명의 소년들을 선발해서 가르치면 어학을 배우는 제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경신학교가 처음 태동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188545일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 날 이후부터 188576일 미국 선교부로 편지를 보내기 전 기간의 어느 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기독교학교에서 이루어진 교육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언더우드가 한국 정부로부터 18862월에 정식 허가를 받아 1886511일에 정식으로 학교를 개교하였다. 당시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인 김윤식은 다음과 같이 치사를 하였다. “我國政府百姓을 위하여, 父母 없는 아이와 家舍 없는 아이를 救濟하려고 집을 정하여 먹여 살리고 敎長을 두어 漢文國文工藝之業을 가르쳐 나라에 쓰이게 하신다 하오니 이는 世上事에 으뜸가는 善政이라, 우리 政府에서 생각지 못한 일을 이처럼 실시하려 하시니 뉘가 듣고 좋아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도 허락을 받아 1886511일에 서울 정동에 있는 언더우두 사택 옆의 한옥에서 1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언더우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선교부에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일 년여 전에 고아원을 개원했습니다. 1886511일에 한 명의 소년을 데리고 시작했습니다. 한 명은 입학지원자를 받았고 3명은 보류 상태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이곳에 온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그 사업을 축복해주시고 특별히 우리 앞에 높인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사택 바로 근처에 있는 큰 한옥 한 채를 적절한 가격에 구입해서 수리했습니다. $500이 조금 넘게 들었습니다.”

최초 기독교학교에서 이루어진 교육내용은 당시 기독교학교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교과목은 국어, 한문, 영어, 성경 등이었고 새벽 5시 반에 기상하였으며 이른 아침에 한문공부와 아침기도회를 갖고, 그 후에 아침 식사를 했으며, 암송 위주의 영어 공부, 성경공부로 오전 일과를 끝냈다. 그리고 오후에는 수업, 놀이 및 한문공부를 함으로써 하루의 일과를 끝냈다. 초창기부터 기독교학교는 신앙과 학문이 조화된, 그리고 공부와 생활이 통합된 교육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2) 초기 기독교학교의 성격

 

(1) 기독교학교의 선명한 정체성

초기 기독교학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로서 이름뿐인 기독교학교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기독교학교였다. 우선 설립주체가 교회 또는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로서 기독교적 건학이념을 갖고 설립된 학교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기독교학교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단지 기독교의 교세확장만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첩경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학교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교과목은 역시 성경이었다. 언더우드학당의 교과목은 성경, 찬미, 기도, 그리고 한문과 초보 영어 등이었다. 언더우드가 학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동안 선교사들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묵인하던 정부가 돌연 조약상에 명문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 공사에게 한미조약에는 학교를 개설하여 종교를 전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통고문을 발송했다. 이것은 언더우드를 겨냥한 조치이지만 언더우드는 교과목에서 성경, 찬미, 기도를 배제하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그 때부터 성경시간과 예배시간에 한해 문지기를 세워 경계를 서게 하면서도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마포삼열 목사가 학당장이 되면서 학교 이름이 예수교학당으로 명명되는데, 이는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언더우드가 추구했던 자기 동족들에게 진리를 간증하게 할 전도사와 교사를 양성하는 설립이념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교과목에 있어서도 한문성서를 교재로 한 <성경공부>가 있었으며, 이와 별도로 <십계명><예수의 생애> 등이 채택되었다.

 

(2) 기독교교육을 통한 선교

초기 기독교학교는 단순한 전도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었다. 언더우드는 기독교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복음선교가 중요하지만 교육을 통한 선교가 가능하며 사람을 키워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우고 파송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추구하였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한국 선교회가 189710월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복음선교가 의료나 교육보다 우선적인 선교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더우드학당의 폐쇄를 결정한 것에 대해서도 언더우드는 학원선교는 지속되어야 하며 일반학교의 모델 학교(model school)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베어드(W. M. Baird)와도 생각을 달리하였는데 베어드는 철저하게 교회설립을 우선시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교육관을 갖고있었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학교보다 현장 전도에 나서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교육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소망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1904년 북장로교 한국선교회 선교 2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서 교육을 통한 정치적, 지적, 영적으로 악정과 무지와 미신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기독교 한국을 꿈꾸었다.”

사실 최초의 기독교학교는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그 교회가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학교가 세워진 후 그 옆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언더우드는 1887927일에 자택 사랑방에서 우리나라의 최초 개신교회라고 할 수 있는 새문안교회의 창립을 주도한다. 경신사는 이를 칼빈(J. Calvin)이나 녹스(J. Knox)가 말한 교회 옆에 학교가 아니라 원두우 학당장에 의해 학교 옆에 교회가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솔내교회가 교회당을 짓기 전에 학교건물부터 먼저 짓는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이렇듯 초기 기독교학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3) 긍휼의 교육

최초의 기독교학교는 긍휼의 학교였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원을 시작하면서 그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하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난과 질병, 특히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자녀들은 고아가 되어 길거리를 방황하였다. 더욱이 갑신정변을 치르면서 수구당이 득세하자 개화당의 인물들이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게 되어 그들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어 거지로 전락하게 되었던 상황이었다. 기독교학교는 그 실존적 상황과 괴리되지 않고 기독교적 긍휼 정신에 입각한 교육적 사명을 수행한 것이다. 학교부터 먼저 세우고 그 학교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맞는 학교를 세우고 철저히 그들을 위한 교육을 실천한 것이다.

기독교교육은 긍휼이 여김으로부터 출발한다. 6:34는 이렇게 예수님의 교육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예수 그리스도의 교육의 기초는 불쌍히 여김이었고 긍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 기독교학교의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목욕이다. 온통 먼지와 때, 더러운 것들로 뒤범벅이 된 고아의 몸을 씻기는 것은 어떤 가르침보다도 중요한 교육이었다. 초기 기독교학교의 교육은 말로 하는 입술의 교육이 아니라 이렇게 삶으로 긍휼히 여기는 섬김의 교육이었다. 아이들을 목욕시키다가 새롭게 시작된 학교가 바로 정신학교이다. 18876월 초순경에 언더우드학당에 신입생들이 들어와 그들을 목욕시키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여자 아이인 것이 드러났다. 이 아이는 정네(후에 이임순)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는데 언더우드 목사 자택 동쪽 담너머에 살고 있던 제중원 여의사인 엘러스(Annie J. Ellers)에 보내졌고 그녀가 이 정네라는 고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학교가 정동여학당으로서 1888년에 북장로교 선교부의 허가를 받게 되는데 바로 오늘날의 정신여학교의 출발인 것이다.

 

(4) 기독교 한국의 비전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학교들은 꿈 덩어리와 같았다. 기독교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와 교회, 개인들이 꿈이 있기에 학교를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도 꿈이 있기에 학교에 오게 되었고 학교는 꿈을 잉태하고 이를 실현시키는 산실의 역할을 하였다. 언더우드가 경신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의 꿈이었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지만 그의 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신학교를 통해 펼쳐지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이 그의 기독교교육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북장로교 한국선교회 선교 20주년 기념 강연이다. 다음은 그의 강연의 내용이다. “나는 앞으로 모든 읍과 마을에 학교가 세워져 가르치는 공동체 정신을 가진 기독교 교사들을 보게 될 것이고, 모든 대도시에 세워진 중고등학교, 고등교육 기관, 의과대학과 간호학교를 보게 될 것이다. 모든 도시에서 자급하는 병원들, 유능한 토착인 여자 전도인들, 성경고사들, 고통 받는 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자에게 빛과 위안을 주는 여집사들,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기관들을 볼 것이다. 나는 기독교 가정, 기독교 마을, 기독교 통치자, 기독교 정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읽노라면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그 유명한 연설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가 생각난다. 그는 인종차별이 극복되는 나라를 꿈꾸었는데, 언더우드는 기독교 한국을 꿈꾸었다. 이 비전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비전과 동일하다. 그가 세운 언더우드학당은 고아원에서부터 시작된 조그마한 학교이고 재정적으로 열악한 형편이었지만 그러나 그 학교를 통해 바라보는 미래는 원대하고 찬란하다. 기독교교육 조선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의 꿈, 그래서 척박하지만 그 꿈을 품고 현실 속에서 교육 수고를 감내하게 되었을 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주지하는 대로 경신학교에서부터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태동하게 되는데, 경신학교에 대학부가 설치되고 이 대학부와 배재대학 대학부의 연합으로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 학교가 해방 후에 연희대학교, 1957년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통합되어 연세대학교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는 그 시작이 같으며 1885년 시작된 언더우드 학당이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꿈을 잃어버린 교육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며, 꿈을 잃어버린 학교는 더 이상 학교가 아니다. 무엇보다 기독교교육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1:1)를 보게하는 교육이다. 기독교학교를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학교의 사명이 아니라 기독교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학교가 되는 것이다.

 

(5) 관계교육, 공동체교육

초기 기독교학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관계교육이다. 경신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서 여러 명의 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시작되었고, 정식으로 개교하여 언더우드학당을 시작할 때에는 오직 한 명의 학생을 앉혀 놓고 개교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 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고, 앎과 삶이 분리된 교육이 아니라 삶이 바로 교육인 그런 교육이었다. 더군다나 언더우드 학당의 경우에는 고아원 학교로서 모든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학교였던 셈이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동체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존 웨스트호프(John Westerhoff III)가 그의 책 교회의 신앙교육’(Will Our Children Have Faith?)에서 신앙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고 주장하였는데, 초기 기독교학교야말로 공동체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신앙과 인품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학교인 언더우드 학당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고아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학당에서는 다행히 성명을 갖고 있는 특수층 4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이름 없는 학생들에게 부르기 좋고 뜻이 좋은 복(((((((() 등 한자를 인상과 적성에 따라 배열(排列)하여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혈통을 대신하는 성()은 족보도 없이 아무렇게나 붙여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애써 붙여주지 않았다.” 마포삼열 학당장의 메모에 재적 27명의 학생명단이 연령과 학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었는데 1891년의 학생명단은 다음과 같다. “. 석남이, . 복동이 순복이 정학이 응환이, . 태성이 삼복이 옥순이 순남이 금돌이 흥열이 흥복이, . 김봉갑 봉칠이 김일성 방믕울 금복이 이남기, . 금봉이 기동이 은석이 양길이 복영이 유길이, . 홍남이 유길이 부익이 장갑이.” 이름을 지어주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기독교학교, 이것이 최초의 기독교학교가 지닌 모습의 일면이었던 것이다.

 

3. 기독교학교 정체성 왜곡의 역사

 

1) 일제의 기독교학교 탄압

1885,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된 경신학교를 필두로 기독교학교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토착교회에 의해서 많은 기독교학교들이 설립되었다. 백낙준 박사가 교육문예부흥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기독교학교의 설립이 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학교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존립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890년대부터 1909년까지 기독교학교가 지속적으로 증가, 확산되다가 1910년부터는 폐교하는 학교가 오히려 늘어가고 기독교학교 수가 감소세로 돌아서게 되는 데에는 재정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라 일제가 여러 가지 법령을 공포하며 의도적으로 사립학교, 특히 기독교 사립학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 해에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고, 드디어 190511월에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맺음으로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이때부터 의도적인 식민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교육 분야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학부에 일본인 고문으로 시데하라가 학정참여관으로 부임하였으며, 손인수에 의하면 시데하라는 한국인 청소년들이 사용할 교과서를 편찬하고, 일본인 교사를 채용토록 했으며, 각급학교의 교명을 변경토록 하는 등 한국교육의 실제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06년에 통감부 서기관인 다와라를 학부의 촉탁으로 파견하여 시데하라의 후임으로 학정참여관이 된 미쓰지와 함께 한국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공포된 수많은 교육관련 법령들이 이 땅의 기독교학교들을 폐교하게 만드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통감부 소위 식민지교육을 펼치기 위해 1906년 이후에 공포한 교육법령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제의 공포 교육법령(1906-1909)

법 령

공포 년

법령구분

사범학교령

고등학교령

외국어학교령

보통학교령

고등여학교령

사립학교령

사립학교보조규정

공립사립학교인정규정

교과용도서검정규정

실업학교령

실업학교령시행규칙

고등여학교령시행규칙

사범학교령시행규칙

고등학교령시행규칙

외국어학교령시행규칙

보통학교령시행규칙

1906

1906

1906

1906

1908

1908

1908

1908

1908

1909

1909

1909

1909

1909

1909

1909

칙령41

칙령42

칙령43

칙령44

칙령22

칙령62

학부령147

학부령15

학부령16

칙령56

학부령1

학부령2

학부령3

학부령4

학부령5

학부령6

 

이 가운데 특별히 1908826일자로 공포된 사립학교령은 그동안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해 온 사립학교, 특히 종교계 사립학교를 억압하려는 의도에서 발포된 것으로 신설 사립학교는 물론 기존의 모든 사립학교들도 다시 인가를 받도록 규정함으로써 사립학교들을 점차적으로 폐교시키려는 음모를 드러낸 것이다. , 겉으로는 사립학교의 질적 수준의 향상을 내세워 설립 요건을 까다롭게 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시설이나 교육조건이 열악한 사립학교들을 폐교시키기 위한 의도를 지닌 것이다. 사립학교령 제2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2조 사립학교를 설립코저 하는 자는 아래 사항을 구()하여 학부대신(學部大臣)의 인가를 수()함이 가().

1. 학교의 목적, 명칭 및 위치

2. 학칙

3. 교지 교사의 평면도

4. 일개년 수지예산

5. 유지방법

단 기부금에 대하여는 증빙서류를 첨부함이 가()

6. 설립자, 학교장 및 교원의 이력서

7. 교과용도서명

전항 제4호를 제한 외 각호의 사항에 이동을 생()한 시()는 학부대신(學部大臣)에게 보고함이 가()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학부대신이 사립학교 설립을 관장하되 그 설립 요건을 강화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물론 기부금에 대한 증빙서류까지 첨부케 하고, 이를 학부대신이 판단하여 인가를 내주는 방식을 취함으로 사립학교 설립 및 인가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사립학교령을 제정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11년 사립학교규칙을 제정공포하였는데, 이는 1908년의 사립학교령을 대폭 개정한 것으로 사립학교 설립인가 사항을 강화시키고 교과용도서는 총독부 편찬 혹은 검인정 교과서로 한정하였으며, 교원의 자격기준을 일본어에 통달한 자로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총독부는 이러한 사립학교규칙에 의거하여 통치 이전에 출판된 한국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민족정신을 조장할만한 책들을 모두 불살라버리거나 판금 조치를 취하였다. 이렇게 해서 금지된 책 종류가 50가지가 넘었다. 특히 기독교학교에서 민족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당시 기독교학교에서는 십자가 군병들아와 같은 찬송가를 부름으로 항일정신을 고양시켰는데 총독부는 학교에서 찬송가 부르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원의 자격기준에 따라 일본인 교원이 사립학교에 배치되어 일본어 보급을 시도하였고, 결국 사립학교를 관공립학교로 전환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1910년 사립학교 수가 1,973개교이던 것이 1912년에는 1,317개교, 1914년에는 1,240개교, 그리고 1919년에는 690개교로 줄어들어 10년 사이에 3분의 1로 감소하게 된다. 종교계 사립학교도 1910746개교에서 1914년에는 473개교로 감소하게 된다.

일본제국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독교학교 억압 조치는 19153월에 공포된 개정 사립학교 규칙에 의해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개정 사립학교규칙의 주요 골자는 정부가 정한 교과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 성경, 지리, 한국사 등의 과목을 가르쳐서는 안되며 그 대신 그들의 국민의례와 신도사상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학교에 대해서 성경과 종교의식 대신에 수신과목을 가르치도록 한 것은 기독교의 저항의식을 배제하고 일제에 동화시키려는 종교교육에 대한 탄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정 사립학교규칙은 종교교육을 원천적으로 금하는 것이요 기독교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을 금지하는 법적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당시 총독부의 외사국장은 “6년 내지 7년 사이에 한국에는 기독교학교가 하나도 남아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장담하기도 하였다. 그는 경성일보에 게재한 글에서 선교사들은 지금까지 교육에 써 온 돈과 노력을 포교라는 분야로 돌리고, 교육에 관한 모든 일은 정부 손에 전적으로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정 사립학교규칙은 기독교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경시간과 종교의식을 금지시킨 조치일 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 종교와 교육을 분리시키는 조치를 의미하였다. 일제는 이미 1907년의 평양대부흥회를 정점으로 적어도 선교사의 선에서는 종교와 정치 분리를 원칙으로 한 선교 정책 입안에는 성공하였는데, 이를 종교와 교육의 분리로 확대함으로 학교교육에서 기독교교육이나 민족교육을 배제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학교들로 하여금 정체성의 위기로 받아들여졌는데,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적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러한 건학이념이 구현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감리교단의 학교까지 포함하면 일 천 여 개교까지 확장되었던 교회설립 기독교학교들은 사립학교령과 사립학교규칙, 그리고 개정사립학교규칙에 의하여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학교들이 폐교하게 되었다. 1916년 장로교 총회의 평북노회보고서에 의하면 평북에 중심점 되는 선천고을 신성 남녀소학교와 보신여중학교는 인허를 얻지 못하여 폐지되었사오니 매우 섭섭하오며라고 보고하고 있는데 당국의 인가를 얻지 못해 폐교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일부 학교들은 사립학교령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병합 또는 폐합하기도 하였다. 1917년 장로교 총회 평북노회의 학교형편 보고에 의하면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폐합한 학교와 기본금을 삼천원 내지 오륙천원까지 모집한 학교가 여러됨으로 기본금 합금이 일만팔천여원되오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교회 설립 학교들이 생존을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해 총회 시에 평남노회가 보고한 학교형편에 의하면 소학교가 1백 십일처요 남녀소학도가 사천643명이오 교육형편은 재미가 많사오나 재정이 곤란하여 기초가 공고치 못함으로 당국에서 병합 혹 폐지하라는 명령을 받아 병합하기로 진행하오며 기본금 모집하기를 힘쓰오며이라고 되어 있는데, 폐지를 피하기 위해 병합을 추진하며 재정을 모으는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의 기독교 사립학교 탄압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교섭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러한 교섭은 물로 개별 학교가 담당하였지만 이를 지원하고 교단 차원에서 업무를 담당한 주무부서는 각 교단의 학무국이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의 경우는 선교연합회가 감독과 지원을 담당하였다. 그 당시 가장 많은 교회 설립 학교를 갖고 있었던 장로교단(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경우 독노회 산하의 학무국에서 이 일을 관장하였다. 1911년 독노회 회의록은 다음과 같은 학무국의 보고를 담고 있다. “각 처소 중학교에서 형편과 관할의 곤란으로 관부와 몇 달 동안 교섭하여 각각 전과 같이 유지하게 된 것도 있고 전보다 일층 더 확장된 것도 있습니다. 또 이 회의록에 독노회의 학무국이 일제 총독부의 학무국과 교섭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거간에 본회 학무국 위원들이 총독부와 총독부 내무부 학무국으로 더불어 여러 번 교섭함으로 교회 중학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선호한 결과가 두어가지 있었사오니.”

또한 일제가 19153월에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위협하였는데, 그해 총회회의록에 보면 학무국이 총회 차원에서 항거하기를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 “학교에서 예배식과 성경교수하는 일은 십년 후부터는 폐지하라 신학교령에 대하여는 총회가 총독에게 상서하여 예배식과 성경교수는 불폐하기를 허락하여 달라고 간청하시기를 바라오며라는 학무위원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배식에 대해서는 위원 3인을 택하여 총독부에 교섭한 후에 여하히 되는 일을 각 처 교회에 통지해 달라는 보고도 수록되어 있다. , 당시 한국교회의 독노회나 총회의 학무국을 중심으로 일제 총독부의 학무국과 교섭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제 총독부의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제 규칙에 대해서 독노회나 총회의 학무국이 중심이 되어 교단적인 뜻을 모아 항의를 하기도 하여 결의를 통해 통일된 행동 지침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선교연합회도 1915개정교육령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여 일제 총독부의 개정사립학교규칙에 대해 항거하였는데 그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5년 조선총독부령 제 24호로서 공포한 개정사립학교규칙에서 총독부가 여러 가지 변경 사항을 지시하는 가운데서, 한국 안의 기독교회와 선교회가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 수백의 학교를 포함한 모든 사립학교로부터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을 제거할 것을 지시하고 있음에 대하여, 신교파 선교연합회는, 본국의 후원자의 이해관계와 선교회 교역자가 이 나라에 머물고 있는 유일한 목적과, 또한 이들 학교의 유지를 위하여 자금이 모집되고 있는 목적에 감()하여, 지시된 제조건이 우리가 경영하고 있는 학교로 하여금 전적으로 폐쇄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을 확언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는, 공포된 규칙은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성경교수의 자유에 대하여 정부가 일찍 우리에게 확약한 바에 위배되며, 일본 내의 국가교육제도가 사립학교의 종교교육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당국의 주의를 환기코저 하는 바이다. 이러한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기존 학교에 허용된 10년의 유예기간에 우리의 학교를 계속하면서 이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에는 어떠한 수정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바이며, 이 규칙이 즉시로 적용되는 신설학교에 관하여는, 적어도 일본자체 안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조건 밑에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어떠한 조처가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 결의문을 보면 당시 한국교회와 선교회가 일제 총독부에 당당히 맞서서 한국의 사립학교, 특히 기독교학교의 탄압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고 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상황 속에서 깊은 연구와 토의 끝에 매우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문건을 작성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학교의 정체성과 건학이념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총독부의 교육령이 지니는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 개선을 요구하는 이러한 결의를 통해 일제시대 속에서도 기독교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회 안에서도 일치된 행동을 보이지 못한 면이 있었는데, 감리교는 성경교육과 종교의식을 과외활동으로 해도 좋다는 총독부의 양해 아래서, 총독부 방침에 순응하여 학교를 세웠으며, 기존의 배재, 이화, 광성, 호수돈, 정의, 배화 등의 교명을 바꾸어 고등보통학교로 전신하여 인가를 받았다. 반면 장로교의 경우는 기독교학교의 건학이념 구현을 가로막는 성경교육 및 예배의식 금지 자체를 문제시하고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여러 학교들이 보통학교의 인가를 거부하고 잡종학교로서 명맥을 유지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았다. 결국 순천의 성은(聖恩), 선천의 보성(保聖) 등 많은 장로교계 기독교학교가 스스로 폐교의 길을 택하였다.

 

2) 평준화제도로 인한 종교교육의 자유 제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겪은 후 기독교학교는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기독교적 인재 양성에 힘쓰게 된다. 그런데 1969년 시행된 중학교 무시험제와 1974년부터 시행된 고교평준화 정책은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 종교교육과 관련된 대부분의 갈등은 평준화제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4년 고교 평준화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학생들이 종교계 사립학교를 지원하여 입학하였기 때문에 학생의 종교적 인권이 침해되지 않았고, 종교계 사립학교도 종교교육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준화제도 시행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교육과 관련된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학생의 종교의 자유와 학부모의 학교 선택의 자유, 그리고 종교계 사립학교의 종교교육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 평준화제도는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당시 문교부가 과열 입시 경쟁으로 인한 교육적, 사회, 경제적 폐단을 시정하고,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킨다는 명분으로 단행한 것이다. 197212월에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인 서명원 박사를 위원장으로 한 입시제도 연구협의회를 구성하여 입시제도개혁안의 연구를 의뢰하였고, 이 연구를 토대로 고교 평준화정책의 골격을 구체화하여 이를 1973628일에 확정 발표하고 1974년도부터 시행하게 된 것이다. 평준화제도는 네 가지를 평준화하겠다는 정책으로서, 학생의 평준화, 시설의 평준화, 재정의 평준화, 그리고 교원의 평준화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학생의 평준화는 무작위 추첨에 의해 학생들을 학교에 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서열화해놓고 이 순서에 따라 골고루 각 학교에 배정하는 배급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각 학교의 시설과 재정을 평준화한다는 것은 곧 국가 개입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건학이념이나 재단의 재산 상태나 시설이 같을 수 없는 데 이를 동일하게 만들겠다고 한 것이 평준화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학에 지급하는 보조금 문제가 발생하고 사학은 본래의 건학 취지와는 달리 더욱 자생력을 잃어가게 된다. 교원 인사의 평준화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부실한 사학의 경우, 공립학교 교원을 강제 배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경우 사기, 의욕, 신분 등의 제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평준화제도의 시행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립학교를 평준화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평준화제도는 사립학교의 기본적인 속성을 무시한 것으로서 사립학교를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제도인 셈이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은 그의 책 한국교육의 개혁과 진로에서 평준화제도에 사립학교를 포함시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러 가지 학교 여건으로 보아 사립학교는 제도개혁에서 제외하려고 하였으나 사립학교의 수가 공립학교의 수보다 훨씬 많아 사립학교를 빼고 공립학교만으로 제도개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므로 사립학교도 제도개혁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평준화제도의 모델로서 모방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평준화제도라고 할 수 있는 학구제와 학교군제인데, 일본의 경우는 평준화의 대상으로 사립학교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당시 교육부 출입기자는 다음과 같이 이 문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당시 민관식 장관은 일본 도쿄에 사람을 보내 고교배정 입학제도의 실상을 알아오도록 했다. 공주대 체육과 윤석병 교수와 홍대부속초등학교 김동연 교장이 선발됐는데, 이들이 조사한 도쿄의 고교 배정제는 공립고교에만 적용되고, 사립고교는 자율 선택제였다. 이것을 우리 정부가 국,,사립 구분 없이 무차별 적용해 고교평준화라고 부른 것이다. 종교계 학교에 배정된 학생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나라엔 국교가 없다는 구실로 학교의 방침에 따르라며 학생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 당시에도 이미 종교계 사립학교에 배정된 학생들의 불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를 포함한 평준화제도를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평준화제도는 종교계 사립학교를 포함한 사립학교 측의 동의를 구하여 시행한 것이 아니라 군사정권이 일방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사립학교는 사립학교로서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게 되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평준화제도는 지금도 교육적인 논쟁의 핵심에 위치해 있고, 위헌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평준화의 위헌 논의는 주로 학교선택권과 관련되어 있다. 학생의 학습권과 부모의 교육권 및 이 양자의 권리로부터 파생하는 학교 선택권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 평준화와 관련된 학교선택권의 제한이 위헌이 아니라는 취지의 두 건의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와 있는데, 1995년과 2000년도의 판결이다. 1995년 헌법재판소는 부모의 중등학교 선택권을 제한한 것과 관련하여, 거주지를 기준으로 중, 고등학교 입학을 제한하는 것이 학교선택권을 본질적으로, 그리고 과도한 제한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또한 2000년에도 헌법재판소가 학교선택권은 학부모의 헌법상의 권리임은 인정하면서도 학교교육의 영역에서는 국가의 광범위한 형성권을 인정함으로서 위헌이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지적사항은 평준화 무시험제도를 담고 있는 현행 초, 중등교육법 제47조는 학생과 부모의 학교 선택의 자유를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 정신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준화 제도의 위헌적 성격은 평준화가 학생의 종교의 자유, 부모의 자녀에 대한 종교교육의 자유, 이를 위한 부모의 자녀를 위한 학교선택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 인권을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물론, 한국도 가입되어 있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8조와 아동권리협약 14조 등 국제인권조약은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현행 평준화제도 하에서 학생들은 이러한 종교의 자유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종교를 거부할 자유 모두에 대해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부모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녀에게 종교교육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많은 국제인권조약이 부모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녀의 종교교육을 확보할 자유를 존중할 것을 종교의 자유 또는 교육의 권리의 일부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평준화 제도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특정의 종교교육을 확보할 자유도, 회피할 자유도 부정하고 있다. 종교교육을 실시하고자 하는 사학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가 이에 대한 학부모의 선택을 원칙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현행제도는 국제인권규약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평준화는 학생 및 부모의 종교의 자유, 그리고 종교계 학교의 종교교육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 없이는 종교계 사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과 관련된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종교교육 교육과정의 파행

초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교육과정의 문제이다. 기독교학교는 종교교육을 자율적으로 실천함으로 기독교적인 건학이념을 구현하여야 하는데 교육과정에 있어서 기독교학교도 공립학교와 동일하게 정부가 제시하는 국민공통교육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실 헌법 제20조 제1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교육기본법 제6조 제2항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학교에서는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되어 있어서 종교계 사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교육기본법 제25조에서는 사립학교의 다양하고 특성있는 설립 목적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립학교, 특히 종교계 사립학교를 위한 교육과정이 별도로 마련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고등학교의 경우는 교양 선택과목으로 종교학이 개설되어 있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는 교육과정 상에 있어서 종교교육에 대한 지침은 전무하다. 이로 인하여 종교계 사립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을 실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며, 종교교육과 관련되어 교육청의 장학지도와 학교교육의 자율권 사이에 갈등의 소지가 상존해 있다.

한국의 중등교육에 있어서 종교 교육과정의 변천은 전체 교육과정의 변천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미군정기 시기를 지나 1954420일에 1차 교육과정이 공포된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0회에 걸친 교육과정 개정이 이루어진다. 2차 교육과정(1963-1973), 3차 교육과정(1973-1981), 4차 교육과정(1981-1987), 5차 교육과정(1987-1992), 6차 교육과정(1992-1997), 7차 교육과정(1997-2007), 7차 교육과정 개정(2007-2009), 재개정(2009-2011), 재개정(2011- 현재) 등이다. 종교교육과정의 관점에서 그동안의 교육과정 변천을 시대구분 한다면 해방이후부터 제3차 교육과정 시기까지를 신앙교육 시기, 4차 교육과정부터 2009년 재개정까지를 종교교육 시기, 그리고 2011년 재개정 이후의 종교교육과정을 종교학 교육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시기는 신앙교육 시기로서, 해방이후부터 제3차 교육과정 시기까지를 의미하는데 종교계 사립학교들이 특별한 규제 없이 신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둘째 시기는 종교교육 시기로서 교육과정에 종교과목이 개설되고, 그에 따른 종교교육이 가능해진 시기를 의미한다. 셋째 시기는 종교학 교육 시기로서 2011년 재개정 교육과정부터를 일컫는다. 그 전까지의 교육과정에서도 종교과목의 교육과정은 상당부분 종교학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2011년 재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생활과 종교라는 명칭이 아닌 종교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고 그것이 2015년 개정교육과정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교육과정 개정의 방향도 종교를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대하여지적이고 객관적으로 가르치는 종교학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신앙교육 시기에서 종교교육 시기로, 그리고 종교학 교육 시기로의 종교교육과정의 변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특정 종교의 신앙을 중시하는 교육에서부터 종교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강조하는 교육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며, 특정 종교의 이념에 기초한 종교계 사립학교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부터 교육의 공공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종교교육 시기만 하더라도 아직은 종교교육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 종교의 가치를 가르치는 신앙교육의 가능성이 남아있었지만, 종교학을 종교교육의 내용으로 하는 경우에는 보다 더 탈신앙화가 가속화된다. 더욱이 종교과목은 입학시험에 출제되는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의 관심이 부족하고, 기독교학교의 정체성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건학이념 구현을 통한 학생들의 기독교적 가치관 함양이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4. 기독교학교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미래 과제

 

우리나라의 기독교학교가 초창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기독교학교가 130년 전 최초의 기독교학교가 지녔던 기독교학교다움을 회복하고 기독교학교로서의 건학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으로는 국가의 제도와 법의 변화가 필요하고, 미시적으로는 개별 기독교학교 안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1) 거시적 과제: 국가차원

기독교학교가 건학이념과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학교의 자율성, 더 나아가 사립학교의 자율성이 확보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립학교의 존립 근거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학생선발의 자율성, 교육과정 선정의 자율성, 그리고 학교 운영의 자율성이다. 사립학교는 건학이념에 근거하여 학생을 선발할 수 있어야 하고, 건학이념에 맞는 교육과정을 선정할 수 있어야 하며, 적정의 등록금을 책정하여 학교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립학교가 국, 공립학교와 전혀 다르지 않는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시행하도록 강요된다면 이는 더 이상 사립학교일 수가 없다. 특히 종교계 사립학교는 해당 종교의 가치관에 따라 학생을 교육할 수 있는 종교교육과정을 작성하여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사립학교도 학생 배정 대상학교에 포함되어 학생선발권이 박탈되었으며, , 공립학교의 교육과정과 동일한 교육과정을 갖게 되었고, 정부가 재정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자율적 등록금 책정이나 자율적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사립학교는 설립만 학교법인이 했을 뿐, 현재의 기능은 공교육 체계에 편입된 공립대체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학교도 이러한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정체성의 상실로 인해서 본래의 건학이념대로 교육할 수 없는 명목상의 종교계 사립학교로 전락하였다. 기독교교육은 기독교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전 생활, 특히 예배와 성경 수업, 모든 교과의 수업, 교사의 학급운영, 학교풍토 등이 기독교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에 기독교학교의 건학이념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개선방안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 사립학교를 재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사립학교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 공립학교를 위주로 공교육체계를 확립하고, 사립학교는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나 규제 바깥에서 자율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사립학교를 매입하여 국, 공립화 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 공교육에서 사립학교가 차지하는 비율을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평준화 제도 속에서도 가능한 한 선지원, 후추첨 제도의 확대 및 원치 않는 종교계 학교에 배정된 경우 회피하거나 전학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함으로 종교계 학교가 해당 종교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2) 미시적 과제: 기독교학교차원

기독교학교가 법적, 제도적, 구조적으로 사립학교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하지만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적 교육을 추구하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 기독교 사립학교도 국가공통교육과정을 따라야 하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교육을 실천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건학이념 구현의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학교들이 최초의 기독교학교가 지녔던 기독교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이 상황 속에서라도 실현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독교학교의 건학이념과 교육가치 공유

기독교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이 일반학교와는 다른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야 하며, 기독교학교가 지향해야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 왜(why)의 문제이다. 기독교학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또 하나의 일반학교로서의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학생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요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가 있으며, 신적 목적(divine purpose)을 지니고 태어났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지닌 내면의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기독교학교는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입시위주의 교육을 넘어서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자신만의 길(my way)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화이다. 이런 점에서 학원선교는 기독교학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기독교학교가 공립학교와 동일하다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기독교학교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특성화된 학교이어야 한다.

 

(2) 기독교적 교과교육

기독교학교는 단지 예배가 있고 교목실이 있는 학교가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자신의 교과와 학급경영, 학생상담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All truth is God's truth)이다. 모든 교과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원리들을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교과의 교사들이 그 과목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그 과목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과 변화를 기대하는지를 파악하여야 한다. 교과가 신앙과 연결될 때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단지 죽어있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 학생들은 더 이상 지식더미를 머리 속에 집어넣는 노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의 만남을 통해 의미있는 교육에 참여하게 된다. 교과와 자신의 관계, 교과의 의미, 교과를 통해 타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 자기주도적 학습이 가능하며 학업성취도도 향상될 수 있는 것이다.

 

(3) 학생과의 인격적인 관계

초기 기독교학교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으며 긍휼이 모든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기독교학교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학교이다. 마치 에수님과 열 두 제자의 관계처럼 나와 너2인칭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나와 그것3인칭 관계는 지식을 전수할 수 있어도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내면의 울림은 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가 말한대로 가르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학교가 학생 한 명 한 명을 목욕시키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맞춤형 교육을 할 때 그들의 머리만이 아니라 전인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학교는 관계구조를 지닌 공동체가 될 때 그 안에서 가치관의 변화를 포함한 중심(core)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4) 가정과의 연계와 부모교육

기독교학교는 학생들의 변화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정과 연계하여야 한다. 부모가 기독교사와 비전의 동역자가 되어 학생들을 돌보고 양육할 때 교육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학교는 교사교육이나 연수만이 아니라 학부모 교육이나 연수에 관심을 갖고 이를 실천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문제아는 문제부모로 인한 것이다. 가정에서도 기독교학교의 교육가치가 실천될 때 학생의 가치관과 인성, 습관이 올바르게 형성(formation)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일관성은 매우 중요한데 기독교학교에서의 교육이념과 가치가 가정에서도 연결될 때 보다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게 된다. 기독교학교가 학생들의 부모들을 교육하는 것까지를 교육사명에 포함할 때 학생들의 전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속적인 부모교육과 부모들과 학생들이 함께 하는 캠프, 부모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 등은 기독교학교의 역량을 상승시킬 것이다.

 

(5) 미션스쿨로서의 선교전략

평준화 제도 안에 있는 기독교학교는 크리스챤 스쿨(Christian school)보다는 미션스쿨(Mission school)이 더 적절하다. 크리스챤 스쿨은 이미 신앙이 있는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학교지만 미션스쿨은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이다. 평준화가 기독교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학교에게 주는 유익이 있다면 비종교인, 비기독교인 학생들을 기독교학교로 배정해 주는 것이다. 이들 학생들을 위한 기독교교육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그들의 문화와 언어로 소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육신(Incarnation)이야말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교육방법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사건을 의미한다. 기독교학교는 학생들과 문화적 접촉점을 가지면서 그들이 복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소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목실만이 아니라 기독교학교 모든 구성원들의 공동체적인 노력이 요청된다.

 

5. 나가는 말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학교가 설립된 지 130, 그동안 기독교학교가 어떻게 초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과 건학이념을 구현했는지 또는 왜곡했는지를 겸허히 돌아보며 마치 첫 사랑을 회복하듯 기독교학교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보다 더 성숙한 기독교학교의 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특히 분단 7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통일한국을 향한 비전을 갖고 이를 위한 기독교학교의 사명에 대해서도 준비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통일 준비교육만이 아니라 통일 후 한국의 기독교학교에 대한 청사진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개별 기독교학교가 당면한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기독교사 연수, 기독교교육과정 개발 연구, 기독교학교의 역사 발굴 및 편찬, 기독교적 교수방법 개발 등이 이루어짐으로 전체 기독교학교가 발전할 수 있는 공동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학교는 갈림길에 서있다. 과연 초창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명실상부한 기독교학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기독교학교로 존속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이 희석되어 끝내 일반학교로 전락할 것인가? 이 두 가지 길이 앞에 놓여있다. 기독교학교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선택과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기독교학교가 존속되는 길을 선택하고 결단한다면 이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여야 한다. ‘골든타임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학교들이 분연히 일어나 기독교학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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